’29금 로맨스’ 365일

‘365일’ 블란카 리핀스카

365일
Title: 365일
Original Titles: 365 dni (2018)
Genre:
Series:
Series Number: #1
Publisher:
Published: 2018
Time:

호텔 관리직으로 일하다 번아웃이 온 라우라는 서른 살 생일을 맞아 남자친구와 함께 휴식기를 갖기 위해 시칠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곳에서 라우라를 기다리는 것은 연인과의 달콤한 여행이 아닌, 몇 년 전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로 자신의 환상 속에 매일 라우라가 등장한다고 주장하는 시칠리아 마피아 가문의 수장 마시모였다. 라우라는 마시모에게 붙잡혀 그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다음 해 생일까지 365일의 시간을 달라는 기묘한 조건을 요구받는데…….

 

365일
  1. 365일(365 dni),2018
  2. 오늘(Ten dzień), 2018
  3. 또 다른 365일(Kolejne 365 dni),2019

1972년 캐슬린 E.우디위스가 현대적인 의미의 역사 로맨스 ‘The Flame and The Flower”를 발표하면서 일명 ‘보디스리퍼(bodice-ripper : 문자 그대로 보디스를 찢는 사람)’의 시대가 열린다. 이두근을 자랑하는 남성이 가슴을 드러낸 여주인공을 끌어안고 있는 책 표지로도 유명한 이 장르는 주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납치 강간하고(보통은 매춘부로 오해하거나 정략 결혼의 상대자이다.) 성 착취를 당한 여주인이 겪는 스톡홀름 증후군 비슷한 감정이 사랑의 자연스러운 한 과정으로 용인된 시절이다. 이런 소설이 크게 인기를 끈 이유는 ‘오만과 편견’류로 대표되는 전통의 리젠시 로맨스와는 차원이 수위가 높은 성적 묘사와 자극적인 막장 전개가 한몫했다. 현대로 치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페미니즘 진영에서 강한 비난을 받고 제인 앤 크렌츠등의 작가들이 자정 작용에 나서 주류에서 물러났지만, 이 ‘보디스 리퍼 ‘망령은 나름의 인기 있는 플롯으로 끈질긴 생명력이 이어졌고 최근에는 에로틱 로맨스 붐을 타고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기존의 로맨스 소설이 19금 묘사에서 그친다면 29금에 달하는 성적 묘사가 주된 포인트인 에로틱 로맨스 장르에서 초강력 남성성으로 무장한 남주인공과 의존적인 여주인공이라는 설정은 자연스러운 상호의존성과 강한 감정적 접착성을 불러오는 필수 불가결한 구도이다.

토록 많은 대내외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이 장르가 인기인 걸까?  과거에는 성적으로 억압 받는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욕망에 수치심을 느껴 자신이 원치 않는 억압적 성관계라는 면죄부로 성적 만족을 취하려 해서 이런 형식의 소설이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는  설에 힘이 실렸었다.  하지만, 여성이 지위가 과거와는 다르고 에로틱 로맨스도 더는 숨겨서 읽어야 하는 장르도 아닌 마당에 걔 중에서도 이런 반페미니즘적 설정의 소설이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9금을 넘나드는 노골적인 성 묘사에 대한 호기심과 기존 로맨스 소설의 주된 세일즈 포인트 –  남성의 강한 권력과 여성의 자율성 충돌로 일어나는 갈등이 종국에는 여성이 사랑(정확하게는 섹스)이라는 도구로 남성을 굴복시키고 자율성을 획득할 때 발생하는 카타르시스가 여타 로맨스 장르를 뛰어넘어 최고치이기 때문이다.

란드 작가 블란카 리핀스키가 2018년에 발표한 ‘365일(365 dni)’은 위에서 언급한 초강력 남성성을 자랑하는 마시모가 남주인공이다. 그는 악명 높기로 유명한 시칠리아 마피아 가문 가주이자 한 술 더 떠 겉으로는 합법적인 거대 기업을 소유한 자본주의 정점에 올라선 사내이기도 하다. 마시모는 5년 전 총에 맞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여자의 환상을 본다. 기적적으로 깨어난 후에도 여자를 잊지 못한 마시모는 현실에서 그녀를 찾아 헤매다 우연히 환상 속의 여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녀를 약물로 납치(!)하기로 한다. 남자친구와 시칠리아에 여행 왔다가 졸지에 납치된 폴라드인 라우라에게 마시모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365일 동안 자신과 함께 있을 것. 1년 동안 자신을 사랑하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1년 후에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는 조건을 건다.

'29금 로맨스' 365일 1

넷플릭스 365일

가는 반페미니즘이란 비판은 두려웠는지 마시모는 라우라에게 강간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데 그녀를 배려했다기보다 자신의 재력과 잘생긴 외모로 그녀를 손쉽게 소유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시모는 라우라가 대저택에서 공주 같은 삶을 살게 해준다. 천문학적 액수의 명품 쇼핑을 시켜주고 자신의 취향대로 산더미 같은 빅토리아 시크릿을 선물해주며 상대 마피아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세심하게 경호원을 붙여준다. 고급 클럽과 레스토랑, 베니스 영화제 파티, 호화 개인 요트는 당연히 따라오는 옵션이다. 이런 물질적인 공세 외에도 라우라를 향한 마시모의 정신적인 공세도 대단하다. 라우라의 전 남자 친구가 다른 여성과 성행위를 하는 사진을 찍어 정신적 대미지를 입히고  라우라 가족의 신상명세를 파악해 언제든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협박한다. 자신의 소유물인 그녀를 욕보였다거나 보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다. 우리가 중세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설에서 살인이 최고의 구애 방식인 것이다.

시모는 라우라를 작중 내내 ‘베이비 걸’이라 칭한다. 마시모가 라우라와 첫 대면에서 했던 대사 “Are you lost, Baby Girl(길을 잃었나요? 베이비걸?)” 은 이 소설의 열렬한 팬층에게 일종의 밈처럼 불리는데 라우라는 소설에서 점점 ‘베이비 걸’로 퇴화한다. 사실, 라우라는 작가의 자전적인 모습이 많이 투영된 캐릭터이다. 작가는 과거 호텔 업계에서 세일즈 일을 했던 경험이 있고 라우라처럼 남자 친구에게 성적 불만이 있는 상태에서 이 소설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또한,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사디스트였다고 언급했는데 소설 속 똑닮은 라우라의 첫 번째 남자 친구는 마시모에게 응징당한다. 라우라가 회상하는 과거의 삶은 거의 작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납치 전 라우라는 호텔 업계에서 잘 나가던 29살의 커리어우먼으로 블랙아웃이 와 일을 쉬고 있던 상태였다. 납치된 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마시모의 인형일 뿐이다. 마시모는 납치라는 원죄가 있으므로 라우라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도 한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속박된 라우라는 점점 마시모가 한시라도 자신의 옆에 없으면 불안감을 표출한다.

가는 라우라가 주도하는 자발적 성관계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전 남자 친구와 라우라의 껍질만 남은 관계와 그로 인해 성적으로 불만족 상태라는 걸 강조하고 마시모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지면이 닳아 없어지도록 묘사한다. 라우라는 마시모의 조각 같은 외모를 훔쳐보며 끊임없이 성적으로 갈등한다. 마시모가 라우라를 강간하지 않겠다는 것은 성기의 직접적 삽입만 하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그 외 행위는 마시모의 강압적 행위로 이뤄진다.

넷플릭스 365일

넷플릭스 365일

설 속 마시모가 여성을 대하는 방식은 나름 일관성이 있다. 소설 도입부에서 마시모는 환상 속 여자(라우라를 만나기 이전이다)를 떠올리고 성적 욕망이 끌어 오르자 개인 제트기 승무원을 내실로 데려가 강제로 구강성교를 한다. 라우라가 성적 주도권을 주려고 하자 그녀를 침대에 결박하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매춘부에게 마찬가지로 구강성교를 시킨다. 각기 다른 여성과 성행위를 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그는 라우라와 성교 중이다. 라우라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매춘부를 질투하고 파티에 참석해  매춘부처럼 굴었다가 마시모에게 호된 벌을 받는다. 소설 속에서 그에게 여성이란 철저하게 소유물이며 자신이 용인되지 않는 타인 앞에서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행동은 죽음을 불러올 만큼 중죄인 것이다. 라우라는 마시모에게 목숨이 구해진 다음 한 첫 번째 관계에서 앞서 마시모에게 유린되던 여성들처럼 구강성교를 하며 그를 받아들인다. 작가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는데 그 흔적은 소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레이처럼 마시모는 라우라가 육체적,정신적 모두 완벽하게 종속될때까지 성관계를 미룬다.

시모와 라우라의 첫 번째 성관계 묘사까지가 전체 분량의 대략 삼분의 이 정도를 차지한다. 사실 반쯤 읽으면 기계적 성관계 묘사에 지루해진다. 호화스러운 삶, 명품, 비싼 차, 성적인 묘사를 이 소설에서 탈탈 털어내면 아무것도 없다. 라우라는 자신의 자율성을 침해받고 있고 여기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내적 갈등이 발생해야 하는데 그녀가 자신이 납치 상태라는 걸 인식하는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시모와 감정적 연결 고리가 느슨해졌다고 느낄 때 다시 말해 그가 자신에게 덜 집착한다고 느껴 서운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에게 감정적 책임전가의 도구가 납치다.

혼전 임신 문제를 복선으로 깔아놓기 했지만, 이마저 여자 모르게 강제 임신시켜 결혼하려는 스텔싱(성관계 도중 상대방의 동의 없이 피임 기구를 제거하는 행위)에 가까운 범법 행위가 거리낌 없이 이뤄진다. 로맨스 소설의 클리세는 실수로 인한 혼전 임신이고 이를 남녀 주인공이 도덕적으로 책임지며 결혼하는 것이지 범죄 미화가 아니다. 마시모가 적대 세력에게 암살의 위협에 놓이는 사건은 묘사가 빈약해 긴박감이라고는 없고 각자의 연적이 등장해 갈등 구조를 이뤄야 하나 연적 캐릭터가 평면적이라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 마피아 세력을 넣은 것은 두 사람에게 공동의 적을 설정해 권력관계가 자연스럽게 보호 관계로 변질되는 일종의 요식행위다. 가장 최악은 장면 전환을 위한 라우라의 기절이다. 선천적으로 심장에 병이 있는 라우라는 중요 순간마다 기절한다. 코르셋에 졸려 파티장에서 기절하던 빅토리아 시대 여성도 아니고 기절로 남성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킨다는 발상이 가당키나한가?

칠리아 여행을 가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으며 잘생긴 시칠리아 남성을 보며 꾼 백일몽이다. 독자들은 과연 저 남자가 날 사랑할까 같은 불확실성의 게임은 시작부터 시원하게 날려 버리고 강한 남성성 아래 보호받고 싶다는 욕망을 채우며 성에 감금된 아름다운 공주라는 주어진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총 3부로 구성된 265일 시리즈는 1부에서 겨우 남녀 주인공이 결혼을 결심하고 라우라가 임신을 알리는 것에서 끝난다. 2부에서는 임신한 라우라가 마피아의 여자로 사는 이야기 3부는 라우라가 드디어 총에 맞아 마시모가 아이냐 엄마냐는 갈림길에서 고민하며 다시 한번 라우라는 보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갈등 하는 스토리로 알려졌는데 사실 1부에서 3부까지 이게 그렇게 길게 쓸 이야긴가 싶다. 할리퀸 로맨스류에도 납치, 강간, 임신으로 인한 억지 결혼 스토리를 심심히 않게 있지만 그래 봐야 250 페이지고 500페이지 역사 로맨스에서도 1권 안에서 다 해결 볼만 한 스토리다.

기존 29금 에로틱 로맨스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다거나 혹은 넷플릭스에서 이미 동명의 영화를 봐서 미켈레 모로네의 팬이라던가 앞으로 에로틱 로맨스를 쓰고 싶은 사람의 참고 도서가 아니라면 그닥 권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대부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만났을 때라고 이 책을 칭찬했는데 대부의 원작 책은 물론이요 대부 영화조차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확실하다.

작가 블란카 리핀스키가 취미로 쓴 책은 2018년에 폴란드에서 정식 출간돼 1부만 50만 부 넘게 팔리며 다음 해인 2019년 그녀를 고수익 작가 순위 2위에 오르게 했고 각색에도 참여한 동명의 영화는 폴란드에서 2020년 2월에 개봉돼 히트했고 6월에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배급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넷플릭스 월드와이드 1위 순위에 31일이나 올랐고  2020년 많이 본 영화 2위다. 참고로 대체 역사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브리저튼’은 17일 동안 1위였고 많이 본 영화 1위는 ‘퀸스 갬빗’이다. 문화 변방국이라 할 수 있는 폴라드 영화로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외국 로맨스 번역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한국 출판계에서 그것도 로맨스 소설을 전문으로 출간하는 것도 아닌 출판사가 에로틱 로맨스를 정식으로 출간한 걸 보니 새삼 대단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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